파이트 클럽 (1999) - Fight Club
감독: 데이빗 핀처 / 주연: 브래드 피트, 에드워드 노튼, 헬레나 본햄 카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케아 가구의 노예인 차동차 리콜 심사관인 남자. 불면증에 시달리다 '고환암 환자의 모임'에 가게 되고... 환자들과 껴안고 실컷 울고나면 그 날은 편안히 잠도 잘 온다.
어느 날 모임에 새로운 사람이 찾아오니 이름은 '말라'. 여잔데 고환암 모임이라니. 하지만 자신도 거짓말쟁이.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는 그녀의 존재가 싫다.
직업상 여기저기를 다니느라 비행이 잦은 남자는 '타일러 더든'이란 기묘한 매력남과 조우. 비누 사업을 하는 그는 세상일에 비관적이고 음모론을 믿는 듯 하다. 그 날, 두 남자의 만남은 '타일러'의 자신을 때려달란 제안을 시작으로 술집 지하의 '파이트 클럽'을 탄생 시킨다.
남자의 억눌린 인생은 180도 바뀌게 되며, '파이트 클럽'의 회원 수도 점점 늘게 된다. 하지만 단순히 치고받던 클럽은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해져 일종의 테러 조직이 되어간다.
의도치 않던 '말라'와 '타일러'의 관계는 괜히 신경쓰이고, 폭력의 카타르시스마저 공포로 변질되는 것이 두려운 남자. 그는 이 모든 것들을 바로 잡을 수 있을까?
1999년 세기 말 당시. 이 영화 덕에 난 태어나 처음으로 살을 빼기 시작한다. 영화가 의도치 않게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건 사실이며, 나같이 게으른 사람에겐 다이어트란 '작심삼일'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시도는 계속되고 실패의 역사는 반복된다. 나의 뚱뚱함 역시 반복된다.
비계들이 점점 근육질 형아들이 된다는 나레이션이 귀에 꽂혔지만 어찌보면 운동은 단편적 흥미에 불과할 뿐.
영화 자체가 가진 에너지가 맘에 쏙 들었다. '척 팔라닉'의 소설을 샀고, 이어서 DVD를 샀으며, 영화 속 씬들은 무슨 의미인지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스타일리쉬한 액션 영화 이상의 설명은 내겐 무리였다. 끝은 뭔가 해결되지 않은 듯... 왜 이리 허무한가?
2019년이다. 여전히 나는 한계를 내 눈앞에 마주하지만 내심 기대한다. 지금 보면 뭔가 새롭게 보일까? 그렇다.
이건 내가 성장한게 아니다. 자연스럽게 나이가 들어버린 것이다. 싸움질이라곤 해보지 않았지만, 이별에 울어도 보고. 직장상사에게 시달려도 보고, 실패 역시 현재 진행형인... 소위 말해 세월란 펀치에 얻어터지게 된 것이다.
이제는 조금씩 보이는 영화의 맛. 그 안에는 '블랙 코미디'와 더불어 '로맨스'라는 큰 줄기와 자신을 되찾는 법이란 결정적 미션이 존재했으니.
'BTS' 덕분인지 'LOVE YOURSELF' 가 유행이다. 전 세계의 소년 소녀들, 심지어 나이든 어르신들까지 그들의 메세지에 감동한다. 스스로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 나로서는 선인의 말 같기도 하고 뜨끔하기도 하지만 사실 오래 전부터 인식하고 있던 문구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기는 걸까?
분리된 자아 찾기 프로젝트란 요샌 영화 속 단골 소재이지만 당시는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반전을 알고 다시보면 보이지 않았던 여러가지 장치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 센스]도 마찬가지.
감독 '데이빗 핀처'는 이런 영상 미학에 탁월한 감독이다. '스타일리쉬'의 대명사이지만 '파이트 클럽' 이후의 영화들에선 점점 대가로 변모하는 진화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영화만큼은 번뜩이는 편집과 컴퓨터 그래픽의 조화가 단연 일품이라 하겠다. 괜히 MTV 출신의 탕아가 아니다. 그가 시각적인 효과를 영화의 전면부에만 내세우는 감독 같지만, 이야기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엔 이견이 없다. 분출할 입구를 찾지 못하는 현대 남성들의 답답한 심리를 가장 본능적인 소재인 폭력과 변화무쌍한 비쥬얼로 소화해 내는 것이 놀랍다.
나레이터 '에드워드 노튼'의 삶 속으로 깜빡거리며 끼어드는 '타일러 더든'의 난입. 스크린 정면을 응시하며 '타일러'의 장난스런 테러 행위를 설명하는 주인공은 '누가 이런 일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며 관객에게 이해를 구하지만, 정작 사건의 중심에 자신이 서게 될 것은 알지 못한다.
집이 날아가고 직장 상사에게 시달리는 스트레스의 속에서 스스로에게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않고, 타인의 형상에게 답을 구한다. 절망을 회피하고 억압을 방치하는 애처로운 현대인.
미친듯이 가구를 사모으는 그들은 자신과 대화 할 시간을 따로 할애 하지 않는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당신의 이웃을 당신처럼 사랑하라. 그전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라고 말한다. 자신을 사랑하기위해 해야 할 수 많은 일 중 첫 번째는 아마 스스로를 이해하는 일이 아닐까 한다. 나의 행동을 면밀히 관찰하고 들여다 보지 않으면,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모르고 넘어가게 된다.
중반이 넘어 갑자기 사라진 '타일러 더든'을 찾는 것은 이런 여정일지 모른다. 진짜 나를 찾기 위해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하기 위한 몸부림. 공교롭게도 일이 커질대로 커져버려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남들은 다 알고 나만 몰랐다는 걸.
니체가 추구한 자유로운 정신, 자유로운 몸이란 정신과 육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사태를 묵묵히 참고 인내하는 것이 아닌 과감히 실천해야 진정한 참이 되는 것. 어차피 인생은 고통이고 파괴하지 않으면 창조되기 어렵다. 특히 영화처럼 극단적인 경우엔.
그래서 총구를 자신에게 겨눈다. 나는 너, 너는 나니까.
이래서 니체는 무섭다. 그는 이 시대의 진정한 '정신적 헬스 트레이너'임이 분명하다.
결국 이름 조차 나오지 않는 그, '에드워드 노튼'은 '말라'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타일러'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말라'를 좋아하는 자신을 깨닫는다.
나를 제대로 아는 방법을 찾기 위한 성장의 여행 속의 끝은 껍질을 깨버리는 일. 자기파괴의 수순을 밟는다.
프랜차이즈, 광고, 매스 미디어등 우리를 억압하는 도심의 마천루를 부셔버림과 동시에, 혼란스런 자아에게 방아쇠를 당겨야만 그 흔한 사랑의 감정을 인정하게되는 것이 지금의 현대인일지 모른다.
어디서부터 '타일러'란 이중자아가 시작된걸까 하는 궁금증은 DVD 코멘터리에서 감독과 배우들의 대화에서 알 수 있다.
그냥 처음부터 싸이코였단다.
하긴... 고환암 모임 갈 때 부터 비정상이긴 했다.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 [Straight Outta Compton, 2015] - '척'과 '멋' (2) | 2019.07.12 |
---|---|
케빈에 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 2011] - 엄마가 된다는 공포 (0) | 2019.07.11 |
파고 [Fargo, 1996] - 믿어 의심치 않는 세상 (0) | 2019.07.11 |
중경삼림 [Chungking Express(重慶森林), 1994] - 쿨하지 못해 미안해 (2) | 2019.07.10 |
샤이닝 [The Shining, 1980] - 무서운 관종 아빠 (2) | 2019.07.09 |